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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와 예고편/공포/스릴러

[영화리뷰] '언브레이커블', 야누스적인 자아실현과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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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스포일러로 가득차 있습니다. 마음에 걸리시는 분들은 나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 식스센스로 유명한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언브레이커블, 이 작품은 국내에서 그리 많은 흥행을 거두지는 못한 작품이다. 하지만 원래 감독의 이름값이 있기에 영화에 주목할 수 밖에 없었고,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만족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던 영화라고 해야하겠다.

사실 <식스센스>라고 하는 명작을 탄생시킨 감독의 영화이기에 관객들은 자꾸 '반전'에 관심을 두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이 영화에도 사실 반전은 존재한다. 하지만 영화 속 반전이라는 결코 이 영화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이러하다. 영화 포스터가 말해주듯 두 인물이 등장한다. 한명은 데이비드 던(브루스 윌리스), 또 한명은 일라이저 프라이스(사무엘 잭슨)이다. 일라이저 프라이스는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약했다. 그저 우리가 말하는 몸 약한 아이가 아니라, 온 몸의 뼈가 너무도 약해서 쉽게 부러지는 그런 존재였다. 출산때부터 몸의 빼가 부러질 정도의 아이였으니, 그의 일평생은 어떠하겠는가?

반면 데이비드 던은 그러하지 않았다. 커다란 열차사고로 인해서 모든 승무원과 승객들이 목숨을 잃는다. 데이비드 던 한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모두가 즉사하고 운 좋게 병원으로 실려간 승객 한명도 목숨을 잃어버린 마당에 데이비드 던은 말 그대로 머리털하나 상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있는 것이다. 그런 데이비드 던의 삶을 보면 언제 아팠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도 없다.

이렇게 극명하게 대조가 되는 일라이저와 데이비드. 그런 둘의 만남을 이루고자 한 것은 다름아닌 일라이저다. 그는 몸이 너무나도 약한 어린시절부터 만화를 즐겨봐왔다. 바로 슈퍼 히어로가 나오는 만화 말이다. 그것이 일라이저의 동경의 대상이 되기에 그는 더욱더 만화에 빠져드는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생각한다. 자신처럼 몸이 약한 사람이 있다면, 정말 만화속 슈퍼영웅들처럼 튼튼한 몸을 가진 사람도 있을 거라는 것. 그리고 그를 찾아나서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대형사고에서 털끝하나 다치지 않은 데이비드는 일라이저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 당신이 바로 진정한 슈퍼히어로다. 라고 말하는 일라이저의 말 앞에서 데이비드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지만, 점차 일라이저의 말에 끌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능력들을 하나하나 발견해가기 때문이다. 일라이저를 만남으로 인해서 데이비드는 자신이 진짜 슈퍼 히어로의 자질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저 단순히 데이비드의 자신의 능력 발견하기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데이비드가 아닌 일라이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필자의 입장에서는 데이비드는 일라이저를 위한 조연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라이저는 데이비드를 발견하기 위해서 자신의 일평생을 바쳐왔다. 왜 그런 것일까? 만화에 심취해 있었기에 슈퍼 히어로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 그였기에? 위기에 놓은 사람들을 구해줄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 바른 정의이기 때문에?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일라이저의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었다. 그에게서 어떠한 숭고한 이상을 찾을 수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셔였다. 사람은 그저 매끼 먹는 것과 자는 것만으로 모든 만족을 누리는 존재가 아니다. 짐승이라면 그저 하루에 필요한 양식과 충분한 휴식으로 매일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그런 것은 '짐승과 같이 살라'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자신에 삶에 있어서 추구해야 할 목표와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욕구가 사람에게 있고, 이것을 좋게 표현하면 자아실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흔히 우리에게 있어서 자아실현이라는 말은 참으로 유토피아적인 단어로 들리게 된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누구나 꿈을 꿀 수 있는 것, 그리고 꿈을 향해서 달려갈 수 있는 것만큼 멋진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러한 꿈을 향한 욕구가 있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나날이 발전해가고 있다. 문제는 꿈, 자아실현 자체는 순수하게 문제가 없는 것이지만, 그것에 '어떤'이라는 단어가 붙게 될 때 문제는 생겨난다. 왜냐하면 그 욕구, 그 자아실현이 결국 누군가에게 피해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라이저는 유리선생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약한 몸을 가지고 있다. 평범함을 넘은 어떤 모습을 바라지만, 그는 남들이 가지고 있는 평범함 조차 없는 존재였다. 일평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일라이저는 자신에게 묻는다. 자신은 실패작인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삶. 그저 하루에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이 있고 누워서 잘 수 있는 곳이 있다고해서 만족할 수 없는 그런 욕망이 일라이저에게는 있다. 자신이 이 세상에 온 이유를 모른 채, 그렇게 꿈이 꺾인채 살아가는 인생을 그는 살아갈 수 없다. 결국 그는 자신이 실패작이 아님을 증명해나가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일라이저의 선택은 잘못되어간다. 분명 그의 의지와 열정만큼은 순수하고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꿈'이기도 하지만, 그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다른 이들에게는 공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 일라이저가 보여주는 끔찍한 모습들이 결코 영화 속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에 있어서 우리의 주목을 요하게 된다. 모두가 꿈을 꿀 수 있는 사회는 반대로 말하면 모두가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사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유한정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사자가 우리보다 더 평화로운 존재이기도 한 것은, 밀림의 왕 사자는 당일에 먹을 것을 확보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빌딩 숲의 왕이 된 자는 결코 당일의 먹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만족을 위해서 유한정한 사회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다른 누군가는 그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굳이 거대한 권력에 빗대어서 말할 필요도 없다. 먹고 살만한 국가의 일원들이 벌이는 행동하나하나가 빈민국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나비효과'와 같은 결과를 보여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실 자아실현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이 있었기에 인류의 문명은 발전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때로 자아실현의 또 다른 얼굴인 욕망과 욕구는 우리 사회에 또 다른 일라이저를 만들어낼 수 있다. 현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떨까? 자아실현이라고 불리워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욕망과 욕구로 불리워야 할 것인가?

빛과 어둠으로 대표되는 일라이저와 데이비드. 이 둘은 어쩌면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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