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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와 예고편/공포/스릴러

좀비영화의 걸작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원작and리메이크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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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영화는 여느 공포영화에 비해서 은근히 많은 마니아를 가지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된다.  물론 서양의 고전귀신 '드라큐라'나 동양의 '처녀귀신', '구미호' 또한 '좀비'처럼 공포영화의 단골소재로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그리 마니아적인 요소가 존재한다고 보긴 힘들어보인다. 물론 아에 없다고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좀비영화의 마니아만큼은 안 되어 보이는게 사실일 것이다.

원작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

좀비영화가 주는 은근한 매력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공포의 대상이 내가 모르는 저 미지의 그것이 아니라, 바로 5분 전만 해도 나의 옆에서 멀쩡하게 있었던 사람이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 또한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보편적(?)인 공포의 대상이기에 그러지 않을까?

또한 드라큐라나 처녀귀신처럼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지만 처치가 가능하던지 불가능하던지가 최종 판결이 나는 것과 달리, 등장하자마자 머리에 구멍을 내어 활동을 끝내버릴 수도 있는 공포의 대상이라는 점. 하지만 이렇게 손쉬운(?)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몰려드는 좀비 떼들에게 잡아 먹혀 또 다른 좀비가 되어야 하는 안타까움 등이 있지 않을까?

이런 좀비영화는 시대가 바뀌면서 점차 발전해나간다. 사실 초반의 좀비영화는 아프리카의 종교인 부두교로 인해 다시 살아난 시체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영적인 무엇이 육적인 몸과 만나 공포의 대상이 되어서 수많은 이야기를 생산해낸 좀비영화는 어느새 과학적인 원인으로 인해 생겨난 좀비들의 이야기까지 발전해나가게 되었다. '28일 후'나 '레지던트 이블' 같은게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문제는 그것이 영적인 원인으로 인해서 생겨난 좀비들의 이야기던지, 아니면 과학으로 인해 생겨난 좀비들이던지 그들은 걷잡을 수 없는 번식력(?)으로 영화 속 출연진들의 입지와 관객들의 긴장을 조여왔다. 조금씩 다가오는 좀비들로 인해서 말 그대로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는 긴박성, 그 물밀듯이 밀려오는 좀비들로 인해 점차 희망은 사라져가고 관객들은 영상일 뿐이지만 절망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말 그대로 공포의 순간이 된다.

이러한 좀비영화의 걸작이라고 할 것은 아무래도 조지 로메오가 만든 시체3부작일 것이다.

리메이크작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90)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시작한 좀비 이야기는 '새벽'을 거쳐 '낮'으로 이어진다. 특히 정말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영화 '새벽의 저주'는 이 조지 로메로 감독의 두번째 시체이야기 시체들의 새벽의 리메이크 판이기도 하다. '새벽의 저주'는 '새벽의 황당한 저주'라는 리메이크 작품이 나오기도 했으며, 뛰어다니는 좀비라는 독특한 설정도 주목할만 했다.

어쨌든 현대적으로 사람들을 공격하며 다니는 좀비영화의 시초로는 조지 로메로 감동의 시체시리즈를 오리지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체 시리즈의 가장 첫 작품이 바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니 비록 이 영화 1968년이라는 오래된 나이를 먹고 있지만, 분명 공포영화 특히 좀비영화 팬이라면 반드시 봐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1990년에 리메이크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도 같이 보는 것이 진정한 좀비영화를 즐기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아래의 이어지는 리뷰에는 스포일러의 위험이 있습니다.


조지 로메로가 1968년에 만들었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일단 요즘 영화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흑백화면과 째지는 음향소리가 가장 먼저 다가오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특히 리메이크 작과 비교해보더라도 원작이 가지는 음악적 독특함은 영화는 끝이 나더라도 계속 귓가에 울리는 듯한 느낌이다.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특유의 옛날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음향에 공포스러운 부분, 그리고 사람을 놀래게 만들때 나오는 음악까지도 전부 영화가 끝나더라도 귓가에 간직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영화의 시작은 이러하다. 남매가 어머니의 산소를 찾는다. 음산한 분위기 그리고 티격태격하는 남매. 그런데 이때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한 남자가 갑자기 오빠를 습격하고 여동생은 공포에 못이겨 도망을 친다. 주위에는 이상한 걸음걸이로 걸어오는 좀비들... 원작과 리메이크작 둘다 그렇게 숨쉴틈도 없이 초반부터 좀비의 습격을 보여준다. 당황하며 도망치는 여동생, 무작정 발길 닿는데로 찾아간 곳은 어느 한 가정집. 이곳에서 점차 한 두명의 다른 등장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좀비로 인해서 사전설명도 없이 그저 '바바라'(티격대격하던 그 남매의 여동생이름)를 공포에 질려 도망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의 주 무대가 되어버리는 한 가정집. 그리고 이곳으로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는 좀비들과 이곳에 모인 사람들과의 갈등이 펼쳐지게 된다. 밖은 좀비요 안은 다투는 사람들이니 말 그대로 내적 외적 갈등요소가 다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 여러 위험 요소가 있는 상황속에서 '바바라'는 어떻게 행동하게 될 것인가? 원작에서 그녀는 옆에 있으면 한대 후려치고 싶을 정도로 '정신나간 여자'의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시대가 흐른 리메이크 작에서 '바바라'는 그렇게 넋나간채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좀비로 인한 충격을 추스리고 좀비와 싸우는 여전사로 바뀌게 된다. (어쩌면 레지던트 이블의 여전사의 원흉이 이 여인이라고 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반은 웃자고 한 소리다.)


리메이크 작이 가져온 변화는 이렇게 바바라가 수동적 여인상에서 능동적 여인상으로 바뀐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영화 속 흑인인 벤에게도 변화가 생긴다. 원작에서의 벤이나 리메이크 작에서의 벤이나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려고 하는 대상이었지만, 리메이크 작에서의 벤이 조금 더 선한 역에 치우쳐져 있다고 봐야 한다. 특히 벤의 최후가 다른데, 원작에서의 벤은 끝까지 살아남지만 좀비들을 소탕하려고 나온 사람들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조금은 허망한 결망을 가지게된다. 조지 로메로는 블랙코미디적인 생각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벤은 완벽한 인종차별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물론 수동적인 바바라 또한 남성우월주의 사회가 가지는 모습일테고 말이다. 한편 리메이크작에서 벤은 좀비가 되어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이후의 좀비 영화들의 기본적인 규칙이 되는 것 중에 하나가 머리에 충격을 가하면 좀비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나 좀비에게 물린 자는 당장 죽지 않더라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좀비로 변한다는 것 등이 이후 좀비 영화들에서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어쩌면 드라큐라의 특성을 따서 더 공포스러우면서도 지긋지긋한 존재로서의 좀비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원작과 리메이크작이 공통적으로 전해주는 메시지는 간단한다. 좀비의 모습은 바로 투영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저 본성에만 충실하여 사람을 공격하는 좀비의 모습 앞에서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이지만, 정작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 좀비들로부터 쫓기는 사람들 또한 본성에만 충실한 공포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또한 아침이 되어 사람들에 의해 처리되는 좀비의 모습을 보면, 인간 안에 있는 추악한 폭력성이 잘 나타난다고 해야하겠다.


원작이나 리메이크 작이나, 특히 리메이크 작에서 이러한 모습은 더욱 강렬하게 나타나 결국 좀비가 무서운 세상이 아니라 인간이 무서운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밤은 끝났다. 그리고 좀비의 습격도 끝이 나버렸다. 하지만 다가온 아침 그리고 인간의 습격은 더욱 더 잔인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공통의 메시지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라는 영화를 단지 현대좀비영화의 시초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인간성이라는 부분에 대한 깊은 사고를 하도록 만들어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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