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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와 예고편/멜로/드라마/로맨틱코미디

김씨 표류기는 슬픈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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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daum영화 / 본문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반짝반짝영화사(제작)에 있습니다. [배급은 시네마서비스]


최근에 개봉한 영화, 김씨 표류기! 간만에 극장 나들이를 했다. 무슨 영화를 볼까?하다가 요즘 유명한 영화 '김씨 표류기'를 봤다. 그리고 사람들의 평가도 보았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하고, 희망이 있는 영화라는 것이 김씨 표류기의 주된 평가였다. 하지만 난 왠지 이 영화를 보면서 너무도 슬펐다. 그리고 그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짙어졌다. '김씨 표류기'는 슬픈 영화다. 적어도 내게는 '슬픈 영화'다.



그럼 이제 김씨 표류기의 리뷰를 시작해보도록 한다.
1. 아~ 스포 정말 가득합니다. 원치 않으시면 여기서 나가셔야 합니다. ^-^;
2. 제가 원래 좀 길게 쓰는 편입니다. (그냥 가볍게 쓸 수도 있겠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00% 공감가는 이야기를 쓸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별 내용없는 글은 가급적이면 안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1.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버려져야 했던 그들...                                               


처음에 이 영화 포스터를 볼 때 '김씨 표류기'라고 해서 나는 정재영의 '표류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정재영만이 표류하는게 아니라, 정려원도 표류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앤딩자막이 올라갈 때 완전한 확증으로 굳어졌다. 왜냐하면 앤딩자막에 '남자김씨 정재영', '여자김씨 정려원'으로 나왔기에... 이것만큼 확실하게 빼도박도 못하는 증거가 어디있는가? 결국 김씨 표류기는 밤섬에서 표류하는 정재영과, 방구석에서 표류하는 정려원의 이야기였다. 아니 두 김씨였다.




하필이면 왜 '김'씨였을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는 바로 '김'이다. 어쩌면 박,이,최 등을 선택한 것보다 '김'을 선택한 것은 더 적절한 제목이었는지 모른다. 쌔고 쌘 김씨라는 것이기에... 그렇게 남들과 다른 독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향해 부르는 말은 고작 '김씨'인 것이다. 그렇기에 자막이 더 충격이었다. 분명 영화에서는 두 김씨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정확하게 이름이 기억은 안 나지만, 남자는 주민등록증을 꺼내보일때 나오고,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 나온다. 분명 극중에서 그 둘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자막에서는 '남자 김씨', '여자 김씨'인 것이다.

결국 그들은 '김씨'인 것이다. 아무리 유별난 행동을 해도 누구 하나 이름을 알아주지 않는 그냥 '김씨'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마치는 자막까지도 그들은 그저 '김씨'인 것이다.

영화 실미도의 마지막 즈음에 한 인상 깊은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수류탄으로 폭발할 버스 안에서 실미도 부대원들이 피로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이다. (근데 여기서도 정재영이 나오는구나~) 어짜피 폭발해 버리면 이름을 기록한 것은 남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라도 자신들이 '누구누구'이지, 무장강도가 아님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실미도에 이러한 점은 전체적인 스토리를 잘 꿰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범죄자들이었지만, 그들도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이 아닌 '병기' 취급을 받았고, 그들의 마지막도 그저 폐기처분되어야 할 존재로 세상에 낙인찍히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싫었다. 자신들도 인간이고 자신들도 이름을 가진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무게감은 다르지만, '김씨 표류기'도 그러하다. 그들은 영화 자체 내의 플롯을 뛰어넘어버리는 '자막'까지도 그들을 '김씨'로 부르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철저하게 버림 받은 존재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버림 받은 이들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이 약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정재영은 자살을 시도한다. 더 이상 밀려오는 빚 앞에서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물에 허우적 대는 장면(자살과 연결되는 부분은 아닙니다)에서는 참 연약한 그의 삶이 나타난다. 아버지도 남들이 다하는데 너는 왜 수영을 못하냐며 물에서 허우적대는 자식에게 뭐라고 할 뿐이다. 회사도 영어점수 700점 밖에 나오지 않는 무능력한 그를 채택하고 싶지도 않고, 구조조정에서 버릴 못난이 1순위는 그였다. 심지어 애인에게 조차 능력없다고 버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이 빌린 빚을 갚을 수 없고,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그는 약한 존재이다. 심지어 밤섬에 갇혀 바깥에 나가고 싶어 119에 구조요청을 하는 위급한 상황, 배터리가 없는 상황에서도 그는 남에게 예의를 차려야 한다. 큰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는 거다.

정려원도 그러하다. 학창시절 왕따를 당한 그녀(사실 영화에서 얼굴에 점박이를 한 이유로 보이긴 하지만, 언급대지 아니한 어떤 이유가 있는 건 아닌가?한다. 그리고 감독은 의도적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음으로 관객들이 각자 나름의 타당한 이유를 생각해내도록 하는 장치를 쓰는 것은 아닌가 싶다.) 결국 그녀도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뿐이다. 정려원의 상태가 정확히 어떠한 케이스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대체적으로 그녀의 정신적 약함 때문으로 보여진다.

강한자들만 살아남는 도시라는 정글 속에서 약한 자들인 그 존재감 없는, 이름도 없는 '김씨'들은 버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영화의 아이러니한 장면이 여기에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바로 '살기 위해' 존재한다.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서로 뭉친다. 그런데 이들은 그 生이 있는 곳에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무인도로 간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죽을 수 밖에 없는 死의 상징인 무인도로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살고 싶기에 무인도로 가는 것이다.

생이 있어야 할 현실이 사람을 죽이고, 사가 있어야 할 무인도가 사람을 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약육강식의 도시에서 그들은 도망칠 수 밖에 존재들인 것이다.




2. 살고 싶다. 정말로 행복하고 싶다.                                                      


                         (사실 적당한 사진을 구할 수 없어서, 느낌이 비슷한 사진을 구성할 때가 있음을 밝힙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심장이 뛰고 숨을 쉰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문학적으로 '산다'라고 말할 수 는 없을 것이다. "내가 사는게 사는게 아니야"라는 말이 있잖은가?

그렇게 각자의 무인도로 들어간 그들은 그곳에서 행복하다. 전에 없이 행복한 미소를 보이고 산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이 점도 둘다 비슷하다.) 살아가지만, 둘은 각자 자신의 삶이 너무 행복하다. 그 작은 그들만의 세상으로 만족하고 더 큰 세상은 원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행복은 그 작은 세상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사는게 행복한가? 내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면, 나는 우울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비록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그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다. 그 속 만큼 행복한 것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작은 세상이 아닌 큰 세상을 원한다.

남자김씨의 희망은 '자장면'이다. 사실 무인도에는 자장면이 없다. 그것은 문명의 것이고, 사람 사는 세상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장면'이 먹고 싶다. 영화에서 그것은 단순한 식욕일수도 있지만, 그것은 작은 세상에서 만족하고 싶어하면서도 큰 세상을 동경 할 수 밖에 없는 그의 모습이기도 하다. 떠내려온 텔레비전 속에 사루비아 꽃으로 장식하는 것도 그렇다. 문명, 아니 세상을 거부하지만 왠지 모르게 세상을 동경하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희망이다.

여자김씨도 그렇다. 방구석이라는 무인도에 만족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비록 거짓된 자신이며, 현실이 아닌 온라인이지만, 그녀는 자신을 이쁘다고 해주고, 자신에게 많은 관심을 주는 것을 원한다. 또한 여자김씨가 일년에 두차례, 단 20분만 있는 '민방위 훈련'을 기다리는 모습은 이를 더 잘 보여준다. 그녀는 525,580분을 20분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 민방위 훈련 시간이 다가오면, 그 기대감에 견딜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때야말로 이 작은 세상이 아닌, 저 큰 세상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그 큰 세상은 그녀가 누릴 수 있는 세상인 것이다.

그렇게 남자 김씨와 여자 김씨는 자신들만의 작은 세상에서 누구보다 행복하다. 가끔씩은 작은 세상이 아닌 큰 세상에 대한 사모함이 있지만 말이다.


더 나아가 '김씨'이기를, '김씨'들은 거부한다.


그들은 비록 '김씨'로 불리우는 존재들이지만, '김씨'로 남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그저 변두리로 누군가에게 관심도 받지 못하는 그런 존재로 남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들도 누군가에게는 '김씨'가 되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이 둘의 대화는 서로에게 활력이다. 그 큰 세상이 누구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기에 작은 세상에 들어왔지만, 작은 세상에서 조차 감추지 못하는 누군가와의 만남이라는 것이 그리운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을 위한 것이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어떤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김씨'가 아니라 특별한 존재들이다.


마치 어린왕자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수많은 여우 중에 하나가 아닌 특별한 여우가 되고,
수많은 꼬마 중에 하나가 아닌 특별한 꼬마가 되는 것,
그렇기에 4시에 만나기로 했으면,
3시부터 벌써 견딜 수 없이 기쁜 것

그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無人島는 생물학적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없는 곳이 무인도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화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눈이 부시다.
여자 김씨는 남자 김씨에게 자신이 이름이 아무개라고 말한다.
(난 귀가 잘 안좋아서 내지 머리가 나빠서 이름을 모른다.)
그들은 비로소 '김씨'가 아닌 '누구'인 것이다. 


                                                                             

3. 세상은 그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원치 않는다.                                         


그렇게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행복함이라는 것을 비로소 느끼게 되는 두 김씨들... 하지만 결코 세상은 그들이 그 작은 공간에서 행복한 것조차 원하지 않는다.

남자김씨를 보자. 태풍이 불어닥친다. 밤섬이 엉망이 된다. 그리고 공익근무요원들과 해병대원들이 밤섬의 환경을 정화하기 위해서 찾아온다. 그리고 밤섬에 녹아있는 남자 김씨를 결코 그 자리에서 행복하도록 하지 않는다. 남자 김씨가 원하는 것은 그 작은 것이다.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 작은 행복조차 빼앗아 가길 원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울었던 한 장면이 거기서 나타난다. 해병대원들에게 잡혀 무력하게 있는 그는(여기서 조차 그의 연약함은 드러나고 쫓겨날 수 밖에 없다.) 애원하듯 말한다. 아무 피해도 끼치지 않을테니 이곳에만 있게 해달라고... 그저 아주 작은 행복만 누리며 살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그럴 자비가 없다.



여자 김씨도 그렇다. 남자 김씨가 그런 것처럼, 그녀도 불법속에서 행복했을 뿐이다. 그녀의 미니 홈피의 사기행각이 드러날 때, 그녀는 또 다시 매장 당한다. 그녀의 아픈 과거까지 사람들은 결코 인애없이 사정없이 들추어낸다. 그녀가 어떻게 되던간에 상관없다. 그저 그녀는 그 사이버공간에서 조차 쫓겨나야 할 존재인 것이다.

그렇게 김씨들은 불법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들이 누릴 행복의 테두리조차 또 침범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마지막은 해피 엔딩일까? 새드 엔딩일까?

이 영화에서 가장 관객의 마음을 뛰게 하는 장면은 마지막 장면들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최소한의 행복도 빼앗겨 버린 남자 김씨를 향해, 집 밖으로 나오는 여자 김씨! 처음 먹었던 그 마음대로 정말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신을 없애버리려고 63빌딩으로 가는 가는 남자김씨와 그를 만나기 위해 뛰어가는 여자 김씨! 그리고 여자 김씨와 남자 김씨의 극적인 만남!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고, 비로소 그들은 '김씨'가 아닌 서로를 향해 의지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들이 되어버리는 장면. 그곳에서 영화는 끝이나 버린다. 마치 '그것까지만 보고 싶다'는 감독의 바램처럼...


예전에 '광수생각'이라는 만화가 유행했었다. 거기에 이러한 내용이 있었다. 아들이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왜 동화속에서는 항상 남녀가 결혼하는 것으로 끝이나?"  그때 엄마가 인상을 쓰면서 말한다. "결혼 이후의 이야기를 하면 해피 앤딩이 안 되잖니~!" 그렇다. 동화책은 현실로부터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화속에서라도 행복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물론 결혼하면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말은 아니다.) 이 영화도 그러하다. 마지막은 "참 동화같다." 그렇게 끝이 났으면 좋겠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감독이 끊어버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로부터 고개를 돌려야만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 아닐까? 남자김씨가 애초에 생명을 버리고자 했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말도 안되는 빚이었다. 하지만 그 빚은 결코 해결되지 않았다. 여자 김씨를 만났지만, 그래서 그 둘만의 작은 세계가 형성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또 그를 그저 행복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김씨도 그러하다. 그녀는 자신을 이해해 줄 다른 이를 만났다. 하지만 이는 결국 둘만의 시각인 것이다. 둘을 제외한 타인의 눈으로 보면 한 미친 행색의 여자와 노숙자가 붙어있는 모습 뿐이다. 그녀가 왕따를 당했던 것과 그리 큰 차이는 없다. 아니 그녀를 알고 댓글로 정의사회??를 구현하려고 했던 그들은 이제 또 그녀가 발견될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비록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고 행복이 되지만, 결국 그들보다 큰 세상은 그들이 행복할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마치 동화처럼 그 시점에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고개가 그곳에서 돌려질 수 밖에 없는 그 상황이 나로 하여금 슬프게 만들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마지막 장면이기에 그 장면이 더욱 슬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김씨 표류기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그렇지 아니한가? 결국 우리도 제한된 작은 세계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들이 아닐까? 그렇기에 때로는 그곳에서 나를 알아봐준다면 행복한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김씨 표류기'를 행복한 영화라고 한다. 그렇다! '김씨 표류기'는 행복한 영화다. 그래서 내게는 슬픈영화이기도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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