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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와 예고편/액션/SF

'이솝'이 21세기에 썼을 이야기 <디스트릭트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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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영화의 내용을 마음껏 이야기하며 풀어내진 리뷰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말하는 '스포일러'의 가능성이 있는 리뷰입니다. 혹시라도 원치 않으신다면 나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디스트릭트 9'. 올해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문제작을 뽑으라고 한다면, 필자는 개인적으로 3가지 작품을 뽑고 싶다. 첫번째는 '마더'이다. 우리네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지독한 자식사랑을 비판하는 시선으로도 찬양하는 시선으로도 풀어내지 않고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카메라로 우리네 현실을 바라보도록 만들어 준 영화이기에 '마더'라는 작품에 대해 잊을 수 없는 한해일 것이다. 특히 저자가 두었던 여러 문학적인 장치들은 그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영화가 되었다. 

두번째는 '업'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나온 만화 영화중에서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소위 먹힐 수 있는 영화가 있었다면 '슈렉'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업'은 슈렉보다 더 무게감이 있고 재미도 있는 그런 영화라고 보여진다. 특히 만화영화에 '노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은 최초의 시도일 것이며, 그 시도는 결국 이야기속에 깊이를 담아내게 되어서 '업'이라는 '만화'영화를 만화'영화'로 보도록 만들어주었다. 기존의 아이들이나 어른들 둘 중에 하나에 치중하던 방식을 넘어선 '남녀노소' 모두에게 어필할만한 그런 영화라고 보여진다. 특히 초반 5분은 만화 영화를 떠나 기존의 영화들 중에서도 잊지 못할 그런 최고의 도입장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디스트릭트 9'을 뽑고 싶다. 물론 올해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기에 괜찮은 작품이 더 나올 수 있지만, 현재 상황에서 '디스트릭트 9'이 보여주는 그 파급력은 대단해보인다. 특히 기존의 외계인에 대한 친근감이나 두려움이라는 양분구도의 관점을 넘어선, 새로운 관점의 외계인 영화로서의 '디스트릭트 9'은 이미 그러한 시도 자체가 상당히 충격적인 시도였다고 생각이 된다. 이 영화가 개봉되기 전까지는 제작을 맡은 '피터잭슨'에게만 온갖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것이 티져형식이고 '피터잭슨'이라는 이름만 강조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영화가 개봉한 시점에는 '피터잭슨'만큼, 아니 그보다 더 감독인 '닐 브롬캠프'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만 같다. 그만큼 그의 영화는 충격적인 영화로 기록될 것만 같다.



1. 외계인은 그저 우화속의 주인공일 뿐이다.                                           

'디스트릭트 9' 이미 국내에서도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상당수가 될 것만 같다. 그리고 '디스트릭트 9'의 외계인을 그저 현실과 동떨어진 그런 공상에서의 존재로 생각하기보다는 우리 현실속의 이야기를 빗댄 '블랙코미디'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필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 중에 하나이다. '디스트릭트 9'에서의 외계인은 그리 상상속의 존재로 보여져서는 안 된다. 스필버그의 작품 'E.T'처럼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존재도 아니고, '에이리언'처럼 공포속으로 몰고가는 그런 존재도 아닌, 바로 우리네 모습을 보여주는 '외계인'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이솝우화'를 생각나게 한다. '이솝'이 지었다고 하는 수많은 우화들, '토끼와 거북이'가 아마도 가장 유명한 이야기일 것 같다. [간 빼가러 가는 그 이야기 말고... ] '토끼와 거북이'를 읽는 독자들은 결코 '토끼'를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분류하는 그 '토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거북이'를 "꿈뻑꿈뻑" 눈을 깜빡거리며 네 발로 천천히 걷는 그 동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재능이 있지만 노력하지 않는 자만심에 가득한 이와 재능은 부족해도 열정과 열심으로 살아가는 이의 모습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답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토끼와 거북이'일 것이다.

영화 '디스트릭트 9'도 그러하다. 이 영화의 외계인은 외계인이 아니며, 이 영화의 사람도 단순히 사람은 아닐 것이다. 물론 반은 외계인, 반은 사람이 되어버린 '바커스'도 단순한 변태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이솝이 21세기에 살았다면, 그는 이런 '이솝우화'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어쩌면 '닐 브롬캠프'는 21세기의 이솝의 역할을 잘 감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작/배급사 :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주) All rights reserved.



요하네스버그에 불시착한 우주선, 그리고 그속에서 굶어죽기 일보직전에 처해있었던 '외계인'들, 그들을 받아들인 지구이지만 결코 그들의 존재를 기뻐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성가신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이 거주하는 환경은 그들로 하여금 견딜 수 없게 만들고 난동을 피우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짐승같은 존재로 취급이 되어서 갇혀진 존재로 살아간다. 하지만 계속되는 피해속에서 그들을 '디스트릭트 10'으로 옮기고자 하는 계획이 진행이 되고 그 임무의 책임자가 된 '바커스'는 일일히 외계인들의 서명을 받는 도중에 알 수 없는 물질에 의해서 그도 외계인으로 변태되어져 간다. 그러면서 점점 드러나는 MNU의 현실은 역겨워져가고, '디스트릭트 9'을 둘러싼 그 상황은 결코 깨끗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다루고 있음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영화 '디스트릭트 9'에서의 외계인들은 상당히 지능적수준이 떨어지는 존재로 나온다. 물론 그들이 이룩한 과학은 엄청난 것이었으나 수뇌부가 아닌 일종의 일개미와 같은 대부분의 그 존재들은 어리석은 통제가 가능한 그런 무능력한 존재로 나온다. 사실 그렇다. 무능하며 아는 것 없는 이들이 당하는 사회적인 불이익은 하루이틀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적인 권력은 공평하고 모두를 지켜주는 듯 하지만, 정작 지킴을 받아야 할 존재들에 대해서는 그 권리를 말할 자격도 주지 않는다. 특히 영화 속에서 '마루타' 취급을 받는 외계인들의 상황은 그 갈등의 최고조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MNU의 용병이 조금 진화한 두뇌를 가진 '프런'을 두들겨 패는 장면도 그러하다. 그저 무력 앞에서 힘없는 이들을 굴복시키며, 자신들의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모습은 단순히 '영화'속의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2. 디스트릭트 9을 조금 더 깊게 이해 할 수 있는 장치들                              

여기서 디스트릭트 9을 조금 더 깊게 이해 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장치들을 몇 가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가장 첫번째로 '다큐' 형식의 영화 진행이라는 것이다. '디스트릭트 9'에서는 모든 장면이 '다큐멘터리'처럼 다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이 그렇게 다루어지고 있다. 굳이 '다큐'라는 형식을 빌려서 연출이 되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영화가 영화로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진실성'이다. 마치 "이것은 '허구'가 아니다. 이것은 '진실'이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바커스'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다큐의 내용은 그것을 하나의 기록영상처럼 보이도록 함으로써, 은연 중에 관객으로 하여금 단순한 '영화'로만 보지 않도록 이끄는 요소가 된다.

제작/배급사 :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주) All rights reserved.


다음으로 볼 것은 당연히 '요하네스버그' 이다. '요하네스버그'를 단순히 감독의 출생지였기에 그렇게 정했다라고 볼 수는 없다. 물론 감독은 자신이 살아온 곳이었기에 그곳의 상황을 더 깊게 알았을 것이고, 일부러 '요하네스버그'를 선택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외계인이 나타난 곳이 '요하네스버그'다. 이것은 신선한 충격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이 헐리웃 영화에 길들여져 왔는가? 만약 'UFO'가 서울 상공에 있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나라 감독이 만들었다고 해도 비웃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무대가 되었던 '요하네스버그'는 자연스럽게 인종차별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생각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요소인 것이다. 그 또한 이 이야기는 '영화'가 아닌 '우화'임을 보여주는 요소가 아닐까?

'디스트릭트 9' 이라는 것도 그러하다. 왜 '디스트릭트 9'일까? 영화의 마지막에는 외계인들의 이주로인해서 새로운 지역, 즉 '디스트릭트 10'이 생겨나게 된다.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었던 '디스트릭트 6'를 자연스럽게 생각나게 만드는 요소이다. 1966년 정부에 의해서 '백인전용구역'으로 지정이 되고, 6만명이 가까운 흑인들이 강제이주를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은 '디스트릭트 6'라고 불리우게 된다. 사실 현재의 남아공이라고 해서 만델라의 소원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많은 힘없는 이주민들은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단지 남아공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집트의 이슬람교인들에 의해서 자꾸 쫓겨나 쓰레기더미에서 살아가고 있는 원래 이집트 족속인 '콥트교인'들도 그러하고, 2000년 간 살아온 땅을 자신들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하며 밀어내어 철저망 속에서 가두고 있는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도 그러하다. 미국은 그러하지 않은가?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을 몰아낸 채, 그들을 '보호구역'이라는 미명아래 가두고 통제하는 모습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에서조차 힘없는 이들은 '환경미화'라는 이름 아래서 쫓겨나가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제작/배급사 :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주) All rights reserved.


'서명받기'. 그런데 이 영화가 더 웃기는 것은 바로 외계인 이주 계획에 '외계인들의 서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얼마나 웃긴 일인지 모르겠다. 바로 그것은 우리의 현실성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이름 아래서 얼마나 많은 '불법'들이 자행되고 있는지 모른다. "'법'이라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최소한의 도덕을 이용하여, 얼마나 부도덕한 일들이 뻔뻔하게 자행되고 있는가?이다. 외계인들에게 서명을 받으러 다니면서, 금품으로 그리고 폭력으로 그들을 굴복시키면서 그들에게 서명을 받아낸다. 이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비명문적인 행동을 자행하고 있는 현실은 영화 속의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MNU의 존재는 엄청난 백미이다. 한편으로는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폭력을 자행하는 야누스의 얼굴같은 그 집단의 존재는 우리 시대의 '폭력'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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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함'도 빼놓지 말고 이야기해야 할 요소이자, '디스트릭트 9'의 성격을 잘 읽어낼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디스트릭트 9'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잔인한 장면들이 나온다. 몸이 터지는 것들이 어디 한두번이던가? 때로는 영화 속에서 잔인함이라는 것은 단순히 관객의 눈쌀을 지푸리게 하는 것을 떠나 의미를 담고 있게 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노르만디 상륙작전도 그러하다. 떨어진 팔을 들고 전진하는 군인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다. 전쟁의 잔혹성과 자연스럽게 2차 세계대전의 원흉으로서의 독일에 대한 무언의 비난, 그리고 'pax americana'를 외치게 되는 미국 군인의 고귀한 희생정신까지 이어지는 그 상황이나 '판의 미로'에서 나타나는 잔인성도 그러하다. 이 영화 '디스트릭트 9'에서도 잔인한 장면이 자주 나오게 되는 것은 자연스레 '폭력성'에 대한 무언의 메시지를 담게 된다.



3. '디스트릭트 9'에서도 언제나 살아남는 몸통은 언제까지일까?                   

영화 속에서 주인공인 '바커스'나 외계인들이나 그들을 억업하는 MNU의 용병들, 그리고 갱스터 집단들까지 모두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우왕자왕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구도 속에서 그들은 살아간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몸통이 터지고, 더럽고 힘들고 쫓기는 상황, 목숨의 위협을 받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두손 때고 저 멀리서 관여만 하되, 피해를 보려하지 않는 이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물론 영화 속 마지막에 '바커스'의 장인은 표면적인 '평화'에 의해서 처벌을 받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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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어떠한 사회 구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실제의 이야기들을 살펴볼 때 진정한 몸통과 머리들은 나타나지 않은 채, 항상 모든 이득을 취하는 대신 위험은 넘기는 모습을 보게 된다. '디스트릭트 9'에서 죽어라 움직이는 이들은, 말 그대로 '죽어라' 고생을 하지만 그들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서 조종 당하는 존재일 뿐이다. 뭐... 이 사회도 그렇지 아니한가? 도마뱀 꼬리 잡기에만 치중되는 상황이 아닌가? 어짜피 잘리면 또 다시 자라나게 될 도마뱀의 꼬리 말이다.




디스트릭트 9에 대한 잡담                                                               

'디스트릭트 9'에서 어리바리한 '바커스' 역할을 맡았던 '샬토 코플리'는 장편영화의 출연이 처음인 초짜라고 한다. 그에게서 엄청난 연기를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앞으로도 얼마나 괜찮은 연기를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을 자아내도록 만들어준다. 확실히 '재능'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인가 보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마치 '오펀-천사의 비밀'에서 '에스더'역을 맡은 '이사벨 펄먼'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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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디스트릭트 10에 대해서 기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3년 뒤의 시간이 지나면 과연 '외계인'들은 다시 돌아올 것인가? 그에 대한 감독의 생각은 아직 없는 것 같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속편이 없었으면 한다. 괜히 '디스트릭트 9'의 명성에 금만 가는 작품이 나올 확률이 다분해지기 때문이다. 어짜피 '디스트릭트 9'의 속편이 있지 아니한가? 인디펜던스 데이! "니들 다 죽었어~!" 똑같이 생긴 원반 모양의 거대 우주선이 지구에 오자마자 지구인을 공격한다. 고거 아니겠는가? [물론 농담이니 너무 심각하게 듣지는 말자]

위드 블로그에서 '디스트릭트9' 베스트 리뷰로 뽑혔군요^-^ ㅎㅎ 기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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